‘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전명예회장이 한국현대사를 이끈 ‘시대의 풍운아’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거의 없다.
소양강댐, 경부고속도로,중동 건설시장 개척, 서산간척지 공사 등이 그가 쓴 대표적인 역사다.
정 전명예회장은 ‘하면 된다’는 신념 하나로 모든 걸 일궜다.
얼마전 ‘존경하는인물, 본받고 싶은 인물’이라는 여론조사에서 그가 청소년들로부터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1위를 차지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도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어린시절과 가난을 못 견뎌 무일푼으로 상경, ‘먹고 살기위해’ 닥치는 대로 일만 해야했던 과거가 있다. 혹자는 바로 그 시절이 한국 현대사의 주역이었던 ‘정주영’을 있게 한 자양분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어린시절은 가난과 배고픔에 대한 기억이 전부였다고 되새겼다.
정주영은 1915년 11월25일 아버지 정봉식(鄭捧植)과 어머니 한성실(韓成實) 사이에서 6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지금은 휴전선 북쪽인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아산리 210번지가 원적이다. 서울에서 다섯시간 가량 기차로달리면 닿는 동해안이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곳이다. 그는 코흘리개 나이인 열살때부터 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고 늘 배가 고팠다. 게다가 그 당시에는 일제의 수탈이 심해지면서 아침에는 밥을 해먹고 저녁에는 배가 고파도 잠을 자면 그만이니까 죽을 쑤어먹던 이른바‘ 조반석죽’이 다반사였다. 새벽 4시면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아버지를 따라 들판으로 나서 김매고 흙돋우면 하루가 가곤 했다. 그래도 밥먹고 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린 정주영에게 이 일이 얼마나 싫었던지 생전에 정주영은 힘든 들일을 하지 않아도 됐던 보통학교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회고했다. 정주영은 보통학교 학력이 전부다.
그것도서당을 다니다 뒤늦게 들어가 열다섯이 돼서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교사가 되는 걸 갈망했지만 돈이 없어 사범학교 진학을 할 수 없게 되자 꿈을 접었다. 하지만 평생 땅만 파고 살아야 할 앞날이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소년 정주영은 농촌에서는 ‘미래’를 볼 수 없었다. 이때 정주영은 농촌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한다. 가출을 결심한 것이다.
첫번째 시도는 보통학교를 졸업하던 그해 늦여름이었다. 청진과 나진 지방에 제철소와 항구를 만드는 공사가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같은 마을 지주원이라는친구와 무작정 줄행랑을 쳤다. 당초 목적지는 청진이었지만 배고픔에 원산에서 잠시머물면서 철도공사장에서 막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첫번째 시도는 오래가지 않았다.아버지가 수소문끝에 찾아왔던 것이다. 서울로 향한 두번째 가출은 친절을 가장한 사기꾼에게 노자돈을 털리고 둘째 할아버지 댁에 들렀다가 뒤쫓아온 아버지에게 붙들리고 만다. 그럼에도 농촌을 떠나일한 만큼 벌수 있는 곳을 찾아가야 겠다는 정주영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이번에 소 판 돈을 훔쳤다. 정주영은 아버지가 궤짝속에 넣어둔 소 판 돈을 훔쳐 기차를타고 곧바로 서울로 왔다. 이후 덕수궁 옆 부기전수학원에서 부기를 배우던 그는 또다시 엄한 아버지 손에 끌려 가고 만다. 결국 정주영은 19살 되던 해 늦은 봄, 오인보라는 친구와 서울행 기차를 타고가출에 성공한다. 삯은 벌어서 갚는다는 조건으로 오인보가 빌려줬다. 서울까지 온이들은 객지에서 막일을 할 판인테 함께 있으면 서로 불편하다며 오인보는 서울에남고, 정주영은 인천으로 갔다. 정주영은 인천부두의 하역일과 막노동 등 무엇이든가리지 않고 달라붙었다. 그러나 인천부두 지역의 노동일이 불안해지자 정주영은 얼마후 다시 서울로 왔다. 여기저기서 막일꾼으로 품을 팔다가 복흥상회라는 쌀가게에 취직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의 첫번째 성공이 일궈진다.

정주영은 처음에는 쌀 한가마니 값의 월급을 받고 세끼 식사는 그 집에서 먹는다는 조건으로 일을 했다. 이 가게에서 일한 지 3년쯤 된 어느 날, 가게문을 닫겠다고 마음먹은 주인 영감이 정주영에게 말했다. "자네는 배달을 하면서 여러사람들에게 신용도 얻었으니 그대로 가게를 꾸려가 면 어떻겠나?" 이때가 정주영의 나이스물 셋이었다. 홀로 설수 있는 첫번째 기회가 생긴 셈이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싸전의 주인이 된 정주영은 경일상회로 이름을 바꾸고 서울여상과 배화여고 기숙사에 쌀을 대면서 조금씩 돈을 벌었고 황해도 연백등 쌀 산지에서 쌀을 사들여 서울에서 도매와 소매를 겸했다. 이때 경일상회의 수익금으로 고향에 논 30마지기를 살 정도였다. 아버지 앞에 보란 듯이 설 수 있게 된것이다.
정주영이 쌀가게 이후 기업의 씨앗을 처음 뿌린곳은 건설이 아니라 자동차였다. 1940년 서울로 돌아온 청주영은 일생을 걸 만한 사업을 찾아 헤맸고 쌀가게 단골이자 서울 최대의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이던 이을학씨를 만난게 전기가 됐다. "아현동에 아도서비스라는 차 수리공장이 있는데 그걸 한번 해 보지 그래요?" 산골 소년이 정비업체 사장이 됐고 다시 세도가인 윤덕영의 올즈모빌을비롯한일감이 밀려들었지만 달콤한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자동차일을 배우겠다는 열정으로 도색 일을 배우며 밤을 지낸 뒤 새벽에 세숫 물을 데우려다 신나통에불이 옮겨 붙으면서 삽시간에 공장이 잿더미로 변했다. 모든 것을 날린 그는 다시 빚 3천500원을 빌려 신설동 빈터에 무허가로수리공장을 지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공장문을 닫으라는 경찰의 으름장에 동대문서 보안계장을 한달 동안 쫓아 다니기도 했다.

그는 당시 수리공장이 수리기간을 길게 잡아 바가지를 씌우던 관행 대신수리기간을 단축하고 높은 수리비를 청구하는 방법을 사용, 빚을 모두 갚았지만 42년 5월기업정리령에 의해 공장을 빼앗기다시피한 채 다시 거리로내몰렸다. 정주영은 다시 운수업을 시작했지만 3년그만뒀고 45년 5월부터 46년 4월까지 인생에서 유일한 무직기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섰다. 46년 4월 중구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을 내걸면서 ‘현대(現代)’라는 상호를 처음 사용했다.

정주영은 어느날 관청에 갔다가 건설업자들이 공사대금으로 뭉칫돈을 받아가는것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어 ‘현대토건사’라는 건설사를 세우게 됐다. 47년 5월25일 현대의 모태인 현대건설이 움트기 시작했고 50년 1월 두 회사를합병해 필동에서 현대건설주식회사로 새출발 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정인영이 미군 공병대의 통역을 맡은 게 계기가 돼 미군 숙소를 짓는 일에 손을 대며 돈을 모았다. 특히 52년 12월에는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한을 15일 앞두고 시작된대통령숙소 공사에서 "현다이 넘버원"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더욱이 한겨울 부산 유엔군 묘지를 새파란 잔디로 덮어 달라는 제의에 "콜롬버스 달걀이 별거냐, 풀만 파랗게 나 있으면 되냐"며 반문한 뒤 낙동강가의 보리를 옮겨 심은 기지는 "원더풀, 굳 아이디어"라는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시쳇말로 미8군 공사는 손가락질만 하면 정주영 것이 됐다. 57년 9월 현대가 한강 인도교 공사를 따낸 것은 국내 건설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계기가 됐고 62년에 국내 도급순위 1위를 차지했다. 정주영은 65년 9월 태국 파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하면서해외로진출했고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66년에는 캄란만 군사기지 건설공사에 준설공사 경험을 쌓아 중동 진출의 초석을 마련했다. 일본 기술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콘크리트댐을 사력댐으로 바꿔 예산을 절감한67년 소양감댐 건설에 이어 68년 2월 착공해 2년5개월만이라는 세계 최단시간 완공이란 기록을 남긴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정주영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역작이었다. 정주영은 고속도로가 시공되면서 현장에 간이침대를 놓고 직원들을 독려했다.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나를 비롯한 현대 임직원들은 국가적인 대사 앞에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아니잠이 오지 않았다. 계절을 느끼지 못할 만큼 열심히 일했다" 추풍령에 세워진 고속도로 기념비의 글도 이런 노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나라 재원과 우리나라 기술과 우리나라 사람의 힘으로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길’ 현대조선소의 건립 배경을 보면 정주영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고 중후장대형 중공업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처음에 미쓰비시상사에 차관을 의뢰했다 실패하자 사업계획서 한장과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 한장만 달랑 들고 71년 9월 런던으로 날아갔다. 우여곡절 끝에 돈을 빌리는데 성공하고 조선소도 없이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인 리바노스로부터 26만t짜리 2척을 수주하는 신화를 남겼다.

런던 A&P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나 차관을 들여오려 했을 때 그는‘NO’라고 말하는 면전에 갑자기 거북선이 찍힌 500원자리 지폐를 꺼내 보여 감동시켰다. "이것이 거북선이오. 단지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었을 뿐 그 잠재력은 그대로 갖고 있소" 정주영의 중동진출은 전쟁을 눈 앞에 둔 출사표나 마찬가지였다.
76년 수주한 9억3천만달러 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20세기최대의 역사로 불린다. 7억 리알 짜리 단일 현금수표를 받아내던 날, 외환은행장이 정주영에게 축하전화를 걸어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정회장님. 오늘 건국 이후 최고의 외환보유고를 기록했습니다" 주베일 공사에서 현지인과 외국 기술자는 세가지에 놀랐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하나는 현대의 창의적이고 담대한 공사수행 계획,

또 하나는 속출하는 기상천외의 아이디어,

나머지 하나는 한국인의 근면성이었다.

현대건설은 이때문에 매년 1천여명씩을 신규 채용했고 회사내에 아랍어 강좌를여는가 하면 아랍말로 영화도 만들게 했다. 66년 진출한 자동차산업은 74년에 순수 국산자동차 1호인 포니를 만들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시작했고 1억 달러를 넘는 돈을 쏟아부어 연산 5만6천대 규모의 국산차공장을 착공했다. 86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엑셀이 자동차의 본고장인 미국시장에 진출, 불과 4개월만에 5만2천400대가 판매돼 58년 프랑스 르노가 세운 수출 개시 1년간 최다판매기록을 불과 4개월만에 갈아치우는 기염을 토했다. 80년초에는 바다를 메워 옥토를 만드는 서산 간척사업을 했을 때 조수간만의 차이로 20만t 이상의 돌을 구입해 매립해야만 물막이가 가능해지자 공사비 절감과 공기단축을 위해 내놓은 아이디어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인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공사니까 빠른 물살을 막기 위해서는 폐유조선을침하시킨 뒤 일시에 토사를 대량 투하하면 막을 수 있다"

84년 2월24일 직접 유조선에 올라 진두지휘한 이 유조선 공법은 일명 ‘정주영공법’으로 불리며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서산간척지를 "마음으로 혼으로 아버님을 만나는 나 혼자만의 성지같은 곳"이라고 불렀다. 중후장대형 사업의 여세를 몰아 정주영은 첨단전자 분야에 눈을 돌리고 83년 현대전자를 설립해 세계적인 반도체업체로 성장시켰다. 산업현장을 누비던 정주영은 체육인으로의 활약도 눈부셨다. 81년 서울올림픽 유치위원장을 맡아 불가능하다는 예상을 뒤엎고 불과 5개월만에 서울을 올림픽 개최도시로 만드는 저력을 발휘했다. 특히 그의 아이디어로 정성스럽게 만들어 선물한 꽃바구니는 IOC 위원들의 굳은마음을 움직여 52대 27로 나고야를 물리치고 사마란치 위원장의 ‘쎄울’ 발표를 이끌어내는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는 에피소드도 남겼다. 한국 경제사의 살아있는 신화로까지 추앙받던 정주영은 그러나 92년 대권도전을 정점으로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걷는다. 도전적 예지로 번득이던 정주영의 직관력(直觀力)이 흐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총체적 난국이 나를 불렀다"(92.1 『나의 깨끗한 정치신념』소책자)는시대적소명론을 앞세운 정주영의 대권도전은 당시 세력다툼으로 일관한 정치현실에 신선한충격으로 다가왔다. ‘경제살리기’와 ‘통일경제’라는 슬로건은 기업총수의 정치참여라는 사상초유의 ‘실험’에 대한 사회적 기대감을 한껏 고조시켰다. 이는 92년 1월11일 닻을 올린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이 창당 3개월만인 3.24 총선에서 31석을 차지,원내 캐스팅보터 역할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룬데서 뚜렷이 나타났다. 같은해 5월15일 대통령 후보로 추대된 정주영은 그후 천문학적 자금투하와 그룹의 측면지원을 통해 새로운 정치신화에의 야욕을 불태웠다. 그러나 대선결과는 참패로 돌아갔다. 김영삼 후보를 내세운 당시 노태우정부의‘흠집내기’와 함께 정치권의 진입장벽이 걸림돌로 작용한데다 무엇보다도 민심이 ‘정주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없다’던 정주영의 일생에 결정적 실패로 기록된 셈이다. 지인들은 "정치판에 뛰어들지 않고 그냥 있었으면 ‘경제대통령’으로의 영예를 누렸을텐데..."(장을병)라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정주영은 그후 "낙선은 나의 실패가 아니라 YS(김영삼)를 선택했던 국민들의 실패"라고 애써 의연한 태도를 보였지만 정주영 스스로 정신적 충격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결국 현대그룹은 문민정부 5년간 ‘괘씸죄’에 걸려 톡톡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현대그룹은 직접금융을 사실상 차단당한 상태에서 사업확장 기회를 매번 놓치게 된다. 급기야 95년말거동조차 불편한 정주영은 노태우 전대통령 비자금 수사참고인으로 대검청사로 불려 가 여론의 심판대에 오르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나 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주영과 현대그룹은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는다. 정주영의 ‘통일경제론’과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상호이익을 찾아가면서 남북경협 시대가 본격 개막된 것이다. 98년6월17일 85세 고령의 정주영이까만색 다이너스티를 선두로 소떼 500마리를 끌고 군사분계선을 넘어가는 대역사는전세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프랑스 문명비평가인 기 소르망은 이를 두고 "전위예술적 작품"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또 소떼방북 3개월 뒤인 98년 1월11일 역사적인 현대 금강호의 첫 출항은 89년 금강산개발로 남북교류의 물꼬를 트겠다던 정주영 구상의 결실이었다. 현대의 대북사업은 분단이후 반세기간 진행된 남북사업전체보다도 양과 질면에서 압도적이었고 이는 3년뒤인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데 결정적인 초석이 됐다.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정주영이 간직해온 필생의 과업인 대북사업의 성공은 그러나 자신이 창업한 현대그룹의 몰락을 가져온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수익성이없는 대북사업에 대한 ‘과다출혈’은 그렇찮아도 천문학적 빚더미에 올라앉은 그룹의부실을 한층 심화시켰고 이는 시장의 불신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화(禍)를 초래했다.정주영식 성공의 키워드였던 도전정신이 거꾸로 시장과 국민들로부터 ‘도전’을 받게된 것도 대북사업 진출과 때를 같이한다. 그룹의 몰락은 때마침 정주영의 정신적.육체적 쇠약과 함께 다가왔다. 99년말부터 정주영의 건강에 이상증세가 나타나자 그의 카리스마에 사실상 의존해온 그룹의일인지배체제는 급속도로 균열되기 시작했고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몽구(MK).몽헌(MH) 형제간 갈등이 본격적으로 수면위로 떠올랐다. 정주영은 MH에게 그룹의 적통을물려줬지만 장성한 아들들간의 재산관계를 명쾌히 정리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2000년 3월 14일 밤 MH의 핵심가신인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MK가 전격경질하면서 촉발된 세칭 ‘왕자의 난’은 현대그룹 전체에 대한 시장의 불신을 낳았고 급기야 그룹 의 모태인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로 이어졌다. 5월31일 정주영은 위기를정면돌파 해온 특유의 스타일대로 ‘3부자 동반퇴진’이라는 카드를 꺼냈지만 이미 그룹은 정주영의 통제하에 벗어나 있었다. 과거 현대를 세우고 자식들의 앞날을 좌지우지했던 기백과 파워가 사라진 ‘종이호랑이’ 신세였던 것이다. 가신그룹의 이기주의까지 가세한 형제들의 경영권 다툼은 점입가경으로 치달았고 그러는 사이 건설을포함해 전자. 상선.투신.증권 등 그룹의 사실상 전계열사가 도미노식 부실조짐을 보이면서 시장으로부터 외면당했다. 정주영의 기력은 현대사태가 최고조를 이루던 6월말 방북을 계기로 급속도로 쇠약해지기 시작했고 이후 사리분별을 거의 하지 못한채주변의 보호 속에서 가까스로 명을 이어갔다. 강원도 산골에서 소판 돈 70원을 들고 가출해 맨주먹으로 세계굴지의 기업을 일궈낸 정주영. 그 빛나는 신화의 주역이 구제불능의 애물로 전락한 현대그룹을 지켜보면서 쓸쓸한 퇴장을 맞이했다. 현대그룹은 ‘발전적 해체’를 통해 거듭난다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기존 경영구조로 실추된 신용이 회복될지는 아직까지 미지수다. 역설적으로 세상을 등진 정주영이 자전적에세이 ‘신용은 현금처럼 분배할 수 없다’에서"신용은 분배할 수 없다. 경영자가 재정을 조달하지 못하거나 과욕때문에 분에 넘치게 일을 벌여서 부도가 난다면 그 사람은 자리에 남아있을 수 없다. 그것을 보완할수 있는 사람이 나와서 그 기업을 다시 인수하는 것"이라며 의미있는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