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행거부-역발상으로 재미

기업들이 업계의 관행을 깨뜨리기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특히 전통을 중시하는 한국적 경영풍토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최근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역발상의 경영’을 하려는 기업들이 등장해 재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정유업계의 가격파괴를 주도하는 에쓰오일, 판매경쟁이 치열한 자동차업계에서 ‘원 프라이스(할인판매 사절)’ 정책을 고수하는 르노삼성차, ‘예금유치 제1주의’에 반기를 든 주택은행….



이들은 관행에 길들여진 동업자들의 눈에는 껄끄럽고 불편한 ‘미운 오리새끼’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불합리한 기존 질서에 도전해 무언가 바꿔보려는 시도는 평가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에쓰오일(대표 김선동 회장)은 7월 1일부터 예상됐던 석유업계의 등유와 경유 가격 인상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정유업계의 오랜 관행인 가격 담합을 깬 것이다. 정부가 등·경유에 대한 특별소비세를 올렸기 때문에 가격을 올려야 한다는 게 다른 정유회사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업계 4위인 에쓰오일은 “세금 인상분만큼 원가를 절감할 자신이 있다”며 소비자가격을 동결하겠다고 발표했다. SK·현대정유·LG정유 등 3대 정유사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뒤따라 가격동결 조치를 발표했다.



에쓰오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중가격 파괴’에 나섰다. 그동안 정유업계는 등·경유의 도매가격을 정상가와 할인가라는 이중구조로 유지해왔다. 즉 똑같은 석유제품인데도 주유소에는 정상가격으로 공급하고, 대형 석유판매소(속칭 부판점)를 거쳐 주유소로 흘러들어가는 음성적인 물량은 ℓ당 80~100원 싼 덤핑가격으로 공급해온 것.



이는 남는 물량을 소화하고 시장점유율도 계속 유지하려는 목적에서 업계가 오래 전부터 지켜온 관행이었다. 에쓰오일은 이번에 이같은 이중가격 구조를 깼다. 김동철 상무는 “남들을 똑같이 따라가면 계속 4등밖에 할 수 없다』며 『적정이익만 확보된다면 가격인상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역발상의 경영’도 새로운 흐름이다. 르노삼성차(사장 제롬 스톨)는 작년 9월부터 “자동차 가격을 절대 깎아주지 말라”는 지침을 판매 일선에 내렸다. 이른바 ‘원 프라이스(One Price)’ 정책. 할인판매 경쟁이 치열한 자동차 업계에서 경쟁사와는 반대로 가는 경영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SM5는 르노 회장님에게도 (차 값을) 깎아줄 수 없다, 영업소장 장모님께도 깎아줄 수 없다, 나랏님에게도 깎아줄 수 없다’는 광고문구가 이 전략의 핵심을 잘 설명해준다.



한 번 값을 깎아주면 소비자들은 계속해서 할인을 기대하고, 결국에는 ‘싸구려 차’라는 이미지를 스스로 자초한다는 게 르노삼성차의 분석이다. 오정환 부사장은 “영업사원들의 경쟁이 무분별한 할인과 출혈판매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회사 수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주택은행도 역발상의 경영으로 은행가에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은행권은 전통적으로 예금유치를 가장 중시해왔다. 그러나 최근 김정태 주택은행장은 “대출수요가 적은데도 예금계수만 올려놓으면 은행에 손해가 된다”면서 “고금리를 요구하는 예금은 받지 말라”고 지시했다.

예대 금리차(대출금리와 예금금리의 차이)가 갈수록 좁아지는 상황에서 굳이 남는 것도 별로 없는 예금유치 경쟁을 벌이느라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게 김 행장의 설명이다.



대신 주택은행은 기업들이 회사채를 발행하듯, 금융채를 발행해 자금을 확보하고 있다. 지난해(1조7810억원)에 이어 올 상반기에 1조5600억원어치의 은행채를 발행했다. 은행 입장에선 채권발행(금리 연 5%)이 예금유치(정기예금 연5.5%)보다 훨씬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이다.



경기대 이기영 교수는 “기존 관행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이단」 마케팅이라 고 부를 만하다”며 “이런 기업들이 많이 나올수록 시장이 효율화되고 결과적으로 소비자에게도 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